간만에 새벽잠을 설쳐가며 EPL 최고의 라이벌전을 본 것 같다. 결과를 말하자면 아스날팬인 나로서는 좀 기분 나쁜 패배였지만 글쎄... 경기가 끝나고 화가 나는 것보다는 아스날 선수들에게 박수쳐주고 싶은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사실상 이 경기의 패배로 우승은 물건너 가버렸지만 지금까지 악조건에서 최선을 다해서 싸워준 선수들이 멋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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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팬들은 안습날을 깼다고 난리 부르스를 치면서 기뻐하겠지만 이젠 그런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다만 최선을 다한 아스날 선수들에게 동정심만 더 갈뿐이다. 왜 그런지는 지금부터 언급하겠다. 아스날은 03-04 시즌 이후 벌써 몇 시즌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강호이자 라이벌팀인 맨유와 재벌 구단주덕에 급부상한 신흥 강호 첼시가 최근 몇년간 우승 트로피를 나눠먹었다. 물론 무패 우승을 달성한 아스날 팬으로서 몇년째 트로피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 자체가 좀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이번 시즌은 약간 다른 양상이다.

지난 시즌 아스날은 팀의 상징인 "앙리"를 내보냈다. 상당히 맥빠지는 일이었는데 웬만한 이들은 모두들 외쳤다. 이제 아스날의 심장 앙리가 나간 이상 아스날은 끝없이 추락할거라고... 하지만 앙리가 빠진 아스날은 젊은 피 위주로 유기적이고 아름다운 팀플레이를 이루어내며 시즌 초반 무패행진을 달렸다.

축구는 혼자하는게 아니라 11명의 선수가 모두 조화되어야 최고의 모습이 나온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스날이었다. 그 기세는 도깨비팀 보로(맨날 약팀에는 빌빌대다가 가끔 대어 한번씩 잡아주시는...)에게 발목을 잡히기 전까지 무섭게 진행중이었다. 반면 상당히 스쿼드를 보강한 맨유는 루니와 C날도가 초반에 빠지니까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불안한 스타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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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시즌 초반 그렇게 아스날이 돌풍을 이끈 이유는 앙리의 빈자리를 대신한 아데바요르의 피니쉬 능력 업그레이드와 세스크의 득점력 업그레이드가 합쳐지면서 한 선수에 치우친 축구가 아닌 팀 전체가 골고루 득점 능력을 갖춘 축구를 하면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세스크가 약점이었던 득점력을 끌어올렸고 엄청난 활동량에 비해서 깔끔한 피니쉬 같은 드러나는 성과가 없었던 아데발이 피니쉬 능력을 폭발시키며 초반 상승세를 주도했다.

사실 앙리를 중심으로 하는 팀에서 팀웍을 중시하는 플레이로의 변화를 이끈데는 웽거의 능력이 탁월했다. 타고난 지략가답게 팀의 결원을 다른 방법으로 채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상승세의 아스날에게 있어서 불안했던 점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선수들의 부상과 경험있는 노장들의 부족이었다. 앙리를 판 돈으로 크로아티아 리그 득점왕 두두를 데려왔지만 앙리의 포스에는 아직 부족한게 사실이었고 초반부터 적응을 완벽하게 하는데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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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시즌 초반 별 부상자 없이 팀은 상승세를 달렸는데 수많은 경기를 치루면서 반 페르시, 로시츠키 등이 슬슬 부상으로 인해 스쿼드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페르시는 지난 시즌 말부터 부상이 있었다. 지난 시즌 후반기 (2007년 초) 맨유전에서 기적의 동점골을 넣었지만 부상 중에 무리한 출장을 했던 앙리와 마찬가지로 팀의 승리를 부상의 장기화라는 악재와 바꾸는 선택을 했다. 덕분에 계속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팬들에게 조금씩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어제 맨유전에 또다시 힘든 몸을 이끌고 무리하게 출전했다. 몸상태에 비해서는 선전했지만 무리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스날은 에미레이츠 구장을 지으면서 상당한 부채에 시달렸다. 때문에 경기 티켓의 가격을 인상했고 원래부터 선수영입에 짠물 투자를 했던 웽거의 경제적인 선수 영입 덕분에 어느 정도 부채를 해결했다. 이젠 돈이 상당히 남은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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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기를 통해서 아스날이 사실상 우승에서 멀어짐에 따라 아스날 팬사이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웽거에 대한 비판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거물급 영입보다 유망주 육성에 무게를 두는 웽거의 정책에 무패 우승 이후 몇년간 신뢰를 갖고 지켜보던 팬들도 현실론을 들고 나서면서 비판을 시작했다. 결국 프로는 타이틀의 획득이 최종 목적이란 명제와 함께...

글쎄... 솔직히 내 생각은 이번 시즌 여러가지 난관들을 갖고 시작했음에도 이렇게까지 비판을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물론 나도 스쿼드의 보강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주전 선수가 칼링컵과 FA컵,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까지 한 시즌 내내 풀타임으로 뛸수는 없다. 주전 선수라고 해서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어제 맨유전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역시 서브멤버로 한 팀을 따로 꾸릴 수 있는 현재의 맨유와 서브가 너무나도 부족한 아스날의 대조적인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어찌보면 체력적으로 우위인 맨유의 우세는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시즌 전의 생각들보다 시즌이 시작된 후 기대심리가 치솟으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너무 큰 기대는 그만큼 큰 실망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냥 시즌 전에 했던 모두의 기대심리를 되새겨봤으면 좋겠다. 시즌 전에는 우승은 커녕 3-4위도 간당간당하다고들 했으니 솔직히 지금 낸 성적만 해도 시즌 전 기대치는 충분히 충족 시키고도 남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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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격진에는 이번 시즌 홀로 고군분투중인 데발이.. 역시 그 왕성한 체력도 한 시즌 내내 뛰다보니 후반에는 체력의 급격한 고갈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당장 필요한 페르시는 부상중이라서 제대로 플레이를 펼칠수가 없고 두두는 하위권팀 선수에게 경기중 어이없이 걷어채여서 시즌 아웃되고... 월콧은 원톱형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포워드에 가까우며 벤트너는 장신을 활용한 헤딩력이 일품이지만 그에 비해 필드골이 조금 약점이다. 결국 왕성한 활동량과 제공권, 슈팅력을 제대로 갖춘 멤버는 아데발이 유일한 상황이다.

아데발을 받춰주기 위해서는 미들이 살아야하는데 양 사이드의 흘렙, 로시츠키 콤비도 로시츠키가 아웃되면서 흘렙 혼자 있는 체력 없는 체력 다 소진해가며 힘들게 싸우고 있다. 세스크도 계속되는 경기때문에 시즌 초반보다 페이스가 상당히 많이 떨어졌고 중원에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서 공격진에도 힘이 실리지를 않고 있다.

결국 총체적인 주전들의 체력 고갈이 문제라는 것이다. 리그 경기만도 38경기인데 컵대회랑 챔스리그까지...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치고도 남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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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아쉬운 것은 역시 서브 멤버의 부재와 웽거의 이해못할 선수기용이다. 이번 시즌 초반 레만이 어이없는 실수로 승리를 날려버리자 웽거는 기다렸다는듯이 레만을 내치고 알무니아를 주전에 앉혔다. 항상 레만의 뒤에 가려져있던 알무니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슈퍼세이브를 보여주며 몇번 활약하더니 가끔씩 어이없는 위치 선정과 미숙한 실수들을 하며 경기를 망쳤다. 아직 레만의 내공에는 조금 부족한 것일까. 점점 알무니아 세이브 하나하나에 맘졸이며 보는 경기가 늘어났다.

그리고 질베르투 실바. 웽거의 젊은 선수들 선호도가 커지고 플라미니의 활약이 겹치면서 실바 역시 레만처럼 내쳐졌는데 이렇게 대놓고 기존의 우승멤버를 멀리하는 것은 솔직히 좀 의아하다. 레만과 실바 모두 마음 한 구석에 웽거에 대한 원망이 한가득할 것이다. 레만이 간만에 나왔는데 머리에 계란 하나만한 탈모가 생긴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쓰럽던지.. 그동안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선수들을 젊은 스쿼드라는 테마 아래 너무 가혹하게 내팽개치는 웽거를 보면 가끔 섬뜩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게 프로라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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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이번 시즌은 결국 아무런 소득없이 끝나고 말 것 같다. 챔스리그, 컵대회, 리그 모두 놓친 시즌이 될 확률이 커져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웽거감독도 이제 소신을 꺾고 재정도 튼튼하겠다 다음 시즌에는 주전을 메꿀만한 서브멤버를 제대로 영입했으면 좋겠다. 몇몇 팀들처럼 돈보따리 잔뜩 풀고서 미친듯이 선수 사들이는 모습은 꼴볼견이지만 어느 정도 적절한 영입은 결코 보기에 흉한 것이 아닌 프로세계의 자연스러운 순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팬들이 서로 지껄여봐야 결국 선택은 웽거에게 달렸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있어서 정석은 없다. 단지 모든 사람들의 상식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지. 어찌보면 영입을 절제하는 것은 웽거만의 영입 스타일일수도 있고 모두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일보다 가끔은 비상식적인 것이 해답이 될수도 있다. 어쨌든 이번 시즌을 계기로 선수들도 한층 업그레이드 될수도 있고 선수 개인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약점을 대대적으로 보강하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같았다면 맨유전 패배를 보면서 TV를 바로 꺼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어제는 왠지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전력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감동을 느꼈다. 사실 하그리브스의 프리킥 찬스가 나오자마자 "먹힐 것 같다. 먹히면 TV 꺼버리고 자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과론적으론 정말 안 좋은 결과로 끝났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앙리라는 중심점이 빠지고서 모든 이들의 걱정과 비아냥 속에서 Big 4의 체면을 지켰던 이번 시즌을 그렇게 실망스럽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신구의 조화가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었던 03-04시즌 무패 우승 당시의 멤버들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아스날!!! 죽지 않아!!!

Posted by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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